MBC 선을 넘는 녀석들 '의거로드 in 도쿄'에서는 이봉창의사의 의거지 (사쿠라다몬 경시청앞)와 생을 마감했던
이치가야 형무소 옛터( 지금은 놀이터로 변함)를 돌아보며 그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는 화면이 방송을 탔다.
이봉창 의사의 일대기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폭탄 투척사건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려 한다.
이봉창의사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과점에
취직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고 한다. 커서는
남만 철도회사 용산역 조차과에 입사하여 일하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봉급과 진급에서 차별을 받아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도 얻었고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노동과
장사등에 종사했다. 그는 일본을 좋아했고 일본어도 유창하게 잘하는등
일본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조선인은 조선인이었다. 일왕 즉위식
사건은 그를 대한독립의 투사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봉창의사는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즉위식을 보러 오사카에서 교토로
갔다가, 한글과 한문이 섞인 편지를 불심 검문하던 일본경찰에게
발견되어 경찰서에 11일간 갇혔다가 문제 되는 부분이 없어 풀려났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이 즉위식을 보러온 동료 일본인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자신만 차별을 받는 것이
원통했다.
-- 편지의 내용 --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
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되어 임시정부 직원들과 접촉했다. 하지만 일본 사
람같은 행동과 옷차림, 어눌한 조선말과 유창한 일본말로 직원들의 의심을 받게 된다. 그중 김구 선생이 유일하게 이봉창의사를 믿어
줬고 이봉창 의사와 여러번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진실됨을 알게 되었다. 한날은 임시정부 직원들과 여관에서 술을 같이
마시는 자리에서 대뜸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내가 연전에 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천황이 하야마(葉山)에 간다고 하기에 왕관(往觀)하였는데 천황이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나에게 총이나 작탄이 있으면
어찌할까’하는 감촉이 얼른 생겼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이봉창의사는 며칠후에
김구선생을 만나 일황을 암살하겠다는 뜻을 전하게 된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의사는 안공근의 집에서 대한애국단 1호 단원이 되어 수류탄을 들고 선서를 하며 기념 사진을
<폭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이봉창의사>
선서문에는
선서문(宣誓文)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為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敵國의 首魁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大韓民國 十三年 十二月 十三日(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宣誓人 李奉昌(선서인 이봉창)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 앞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는 안타까워하는 자신에게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러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라고 위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31년 1월 8일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 천황을 향해 도쿄 사쿠라다몬 경시청 앞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히로히토가 타고 있던 마차가 어떤 마차인지 잘 몰랐던 그는 두번째 마차에 수류탄을 던진 것이고 마차를 끌고 가던 말과 마차에
타고 있던 근위병에게만 상처를 입혔다. 폭발 후 일본경찰들은 워낙 소리가 커서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어 엄한 일본인을 구타하며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봉창의사는 "그 사람이 아니고 나다." 소리쳐 자수를 했다.
<거사 직후 체포된 이봉창의사>
다음은 이봉창의사를 직접 심문한 검사가 작성한 것을 번역 옮긴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백정선이라는 이름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위해 김구선생 대신 가공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일찍이 김구선생은 이봉창
의사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게 되면 모진 고문에 시달릴 것을 염려하여 임시정부의 실상을 자백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백정선이 시켜서 한일이며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우겼다.
<얼굴을 가리고 재판장에 들어가는 이봉창의사>
<이봉창의사의 생전 마지막 사진>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바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32년 10월 10일 이봉창의사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향년 31세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봉창의사는 의거는 일본의 심장 같은 곳의 토쿄에서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일왕을 암살하려 했던 조선의 강한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중국 각언론에서는 대서특필되며 이봉창의사는 사건을 칭송하고 일왕을 죽이지 못한것에 대해
아쉬워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한임시정부의 힘이 결집되기 시작하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광복후 1946년이봉창의사의 유해를 돌려 받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으며 1962년 이봉창의사를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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